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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자동차 부품 6.25 특집] 내가 겪은 6.25 이야기

작성자
DDS
작성일
2015-07-09 19:09
조회
1031
월간 자동차부품 2015년 7월호 [ 발행처 :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 ]

[6.25 특집 ]

내가 겪은 6.25 이야기


이중아 (주)대동시스템 회장


필자는 1936년 1월 13일(음력) 제주도 제주시 화북리에서 6남 2녀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先親 이창하(李昌厦 1889.5.4 生~1939.1.3 卒)는 조선 9대왕인 성종대왕의 제2자 계성군파 16대손으로 한학과 한시에 능하신 조부 호은(湖隱) 이진훈(李震薰)의 아드님이시다. 선친 역시 한문과 한시에 능하셨고 화북리 고향에서 화북사립보통학교 한문 선생님으로 9년간 (1929. 3~1937. 2) 재직하였다.

선친은 1938년 일본에서 한학관계로 초청돼 일본으로 가시면서 위의 형님들도 구직을 위하여 일본 대판으로 동행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너무 어려서(3세) 일본에 먼저 간 부친과 형님들이 직장과 생활이 안정된 후에 가기로 하고 모친과 고향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부친이 일본에 가신지 1년만에(50세) 갑자기 병환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일본에 가지 못하고 고향 제주에서 모친과 유년시절을 지내게 되었다.

한편 해방이 되면서 일본에서 제조사업을 하다 서울로 귀국하게 된 세분의 형님들(①李永兒 ②吉兒 ③喆兒)이 공동 출자하여 서울 충무로 3가 대원호텔 옆에 소규모 창고(공장)를 매입, 대동정공합명유한회사를 설립하였다. 형님 사업은 2~3년이 지나면서 점차 매출도 증가하고 회사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갔으므로 필자도 1948년 8월 제주동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상경하여 1948년 9월 서울은평초등학교(은평구 소재) 6학년에 전학하게 되었다. 1949년 7월, 서울은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9월, 마포구 아현동에 있는 경기공업중학교(당시는 5년제 중학교로 고등학교는 없었음) 1학년에 입학하였다.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 속에 학교 공부도 잘할 때였다. 학년 시작학기가 9월에서 3월 학기로 변경되면서 8개월 만에 경기공업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 수업을 시작한 지 4개월쯤 되는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오후 3시경쯤 볼일이 있어 종로 입구에 갔더니 군인들이 탄 트럭에 현수막을 부착하고 마이크 또는 육성으로 북한 공산군이 침공했으니 휴가 장병들은 지금 빨리 부대로 귀대하라는 다급한 방송을 하는 차량들이 수없이 지나갔다. 다음날 26일 조간신문에는 전 전선에 걸친 북한군의 불법침공과 악전고투하는 중에도 우리 국방군의 선방으로 북한군을 물리치고 있으니 시민들은 안심하라는 뉴스로 꽉 메웠다.
▲ 화북사립보통학교 제4회 졸업생 기념사진(1930년), 선친 李昌厦 선생님 앞줄 좌에서 3번째
그러나 3일째인 28일 아침에는 포성과 총성이 멈추고 조용하기에 궁금해서 필동에 있는 집에서 시내(퇴계로 대한극장 앞)로 조심스럽게 나가봤더니 서울은 이미 함락되어 북한군 탱크와 군 트럭들이 간간이 지나다녔으며, 벌써 일부 시민 중에는 북한 인민기를 손에 들고 나와 환영하는 사람도 보였다.

서울이 점령된 지 일주일쯤 되던 날 서울시의 전 중학교(5년제) 학생들은 모두 등교하라는 통보를 받고 학교에 갔다. 전교생을 강당에 집합시키고 외부출입을 통제(감금)한 상황에서 붉은 완장을 찬 국어 선생님이 등단하더니, 6.25 통일전쟁의 정당성과 김일성 장군 찬양연설을 하면서 학생들도 통일 성전 과업 달성에 적극 참여와 자진 군 입대를 강요하는 선전, 선동의 일장 연설을 끝내고 자진입대 희망자는 일어나서 강단 뒤쪽에 정렬하라는 것이었다.

아무도 희망자가 없자 전원 기립시키고 키가 큰 3학년 이상 학생들을 지명하면서 강제 입대 대열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입대자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운동장을 두세 바퀴 돌리고 나서 준비된 군용 트럭에 태우더니 교문 밖으로 사라졌다. 이날의 등교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3개월 동안 단 한 번의 등교였다.

피난 갈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6월 28일 서울이 점령되고 9월 28일 탈환하기까지 3개월간의 북한군 치하의 생활은 고통과 굶주림으로 참기 힘든 긴 세월이었다. 점령당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비축 식량은 다 떨어지고 굶게 되니, 팔아서 돈이 될 수 있는 물건과 가재도구, 시계, 입던 의류 등을 모두 팔아 쌀이나 알 잡곡은 비싸서 못 사고, 밀기울(밀가루를 만들고 남은 껍질 찌꺼기)을 사서 호박잎이나 줄기, 산나물, 가지 등을 넣어 밀기울 채소죽을 쑤워 하루 두 끼만 먹으며 연명 했다.

6.25 전쟁 전에는 홍제동에서 미혼이던 芳兒 형님(넷째), 東兒 형님(다섯째), 필자, 모친 4식구가 같이 살았다. 전쟁이 나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필자는 중구 필동 3가에 사는 큰 형님(李永兒) 집으로 옮겨서 같이 살게 되었다.

젊은 형님들은 밖에 나갔다가 검문에 걸리면 바로 전투지원에 징용당하기 때문에 밖에 나가 활동을 못 하고 집안에 숨어 지내야만 했으며, 나이 어린 내가 형님 대신 외부 활동을 하고 일을 해야 했다. 식량과 호박잎, 가지, 토마토 등 채소와 과일들을 값싸게 사서 장사하기 위해 먼 시골까지 돌아다녔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도 시내 전차는 운행됐기 때문에 을지로에서 영천(서대문)까지는 전차를 타고 이동했고 영천에서 불광동까지는 큰 배낭을 메고 걸어가 가지, 토마토, 호박 등을 사다가 중구청 옆 하원 시장에서 팔고, 팔다 남는 것은 집에 가져와 식량에 보태기도 하면서 생활을 도왔다.

지금 생각해도 초목이 무성한 여름철이었기에 천만다행이었지 만일 서울 탈환(맥아더 인천상륙작전)이 3~4개월 늦어져 추운 겨울이 닥쳤더라면 필시 굶어 죽었으리라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당시 유엔군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게 되고 패주(敗走 싸움에 져서 달아남)하는 공산군을 계속 뒤쫓아 38선을 돌파하고 10월에는 평양을 거쳐 12월에는 압록강 일대까지 진격했으나 50여 만명의 중공군이 참전하여 인해전술로 반격해 왔다. 다시 UN군과 국군은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게 되고 급기야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이 공산군에게 재점령 당하게 된다.

1.4 후퇴 때는 6.25 침공 때와는 달리 전황을 파악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12월 중순부터 서울에 사는 시민 대부분이 피난길에 올랐으며, 필자도 형수님과 어린 조카 넷과 같이 우선 먼저 피난 가기로 하고, 형님들은 제2국민병역과 사업상 정리 등으로 상황을 보면서 다음에 출발하기로 하였다.

당시는 전시 후퇴 피난시기로 어렵게 부산행 열차표를 구하고 형님 도움으로 피난 보따리도 잘 실은 후 모두 승객열차에 탑승하였으며, 열차 출발을 보기 위해 기다리던 형님은 출발 지연으로 먼저 귀가하였다. 한참 후에 밤 12시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열차 안으로 올라오더니 무조건 군인 가족 외는 모두 하차하라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열차에서 내렸으나 집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역무원에 물어보니 다음 정기 승객 열차가 언제 있을런지? 있어도 일반인은 열차표를 구할 수 없을 것이 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추운 겨울이었지만 정비 ·수리하러 후송되는 트럭, 탱크, 병기들을 싣고 있는 후송 대기 무개(無蓋 덮개가 없는) 화물열차 중에서 먼저 출발할 화물열차를 찾아서 갔더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군트럭, 탱크 위아래 빈 공간 없이 빽빽하게 타고 있었다.

좁은 공간을 겨우 비집고 탔으나 서너 시간이나 지난 후 출발하던 열차가 천안역에 정차하더니, 우리가 타고 간 화물열차는 배차 일정상 3일 후에나 출발한다고 하여 먼저 출발하는 다른 화물열차로 짐을 옮겨 갈아타고 하면서, 부산까지 가는데 다섯 번을 갈아타고 12일이나 걸린 후에 겨우 도착했다.

부산 도착 2일 전, 삼랑진역에서 1月초 엄동설한 속에 군 트럭을 실은 무개 열차를 타고 출발을 기다리던 중에 지붕 있는 화물차에 피난민을 가득 태운 다른 열차가 도착했는데, 얼마 후 먼저 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더 태울 공간이 없었으나 역무원에게 사정과 부탁을 하여 어린 조카 넷과 형수님을 먼저 태워 보내고 필자는 피난 짐을 메고 2일이 지난 후 저녁에서야 출발하여 부산에 겨우 도착했던 것이다.

부산역에 도착하여 많은 피난민 속에서 짐을 등에 지고 양손으로는 들었다. 어두운 조명 속에 출구 계단을 올라가는데 한 손에 애를 안고 머리는 헝클어져 내려 정신이 나간듯 한 아주머니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쳐다보니 형수였다. 부둥켜안고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한참동안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형수는 부산에 도착하자 역 근처 여럿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피난민 하숙소 같은 방을 빌려 어린 조카들을 두고 밤낮으로 역으로 나와서 많은 피난민 인파 속에 언제 도착할지 모를 나를 기다리고 찾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형수와 나 모두 경험이나 철이 없었다. 부산에 도착하면 찾아갈 주소(사촌형宅)와 비용(돈)을 각자 나누어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형수 혼자 가지고 있었다. 하마터면 이산가족이 될 뻔했다. 부산에 도착 후 일주일쯤 부산 영도에 사는 친척 집에 머물다 부산-제주 정기 여객선을 타고 고향인 제주도로 다시 피난을 갔다.

1951년 1월초 제주도로 피난 와서 이웃집 아저씨의 소개로 제주시 동문통에 있는 광문(光文)인쇄소에 취직했으며, 그곳 사장님의 도움으로 오현중학교 2학년에 편입해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업을 계속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6.25 전쟁 발발로 휴학한 지 만 1년만의 복학이었다.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신 사장님의 배려가 얼마나 기쁘고 고마웠는지, 마치 친자식의 간절한 소원을 미리 감지하고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의 사려 깊고 따뜻한 정을 느끼며 눈시울이 뜨거웠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후 개인적으로 라디오와 전기 기술에 흥미를 느끼고 다 잊어버렸던 일본어를 다시 배우면서 일본어로된 전기전자 관련 전문서적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광문인쇄소에서 3년간 저녁에는 야간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근무하던 中 하루는 사장님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말씀드리고 양해를 얻어, 오랫동안 갈망하고 소망하던 직장인 高仁善 무선전파사로 이직하여 라디오, 무선, 전기 기술을 배우는 한편, 저녁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학업을 병행하는 보람되고 즐거운 생활을 하였다.

주·야로 직장과 학교에서 열심히 생활하다 보니 어느새 2년이란 세월이 흘러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어, 두 번째 직장인 고인선 무선 라디오 전파사를 퇴직하고 대학 진학을 위하여 상경하게 되었다.

1.4 후퇴 때 전 가족이 제주시로 피난 갔으나 위로 세 형님(①李永兒 ②吉兒 ③喆兒)은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 6.25 전란이 휴전되고 환도가 되어 서울로 입주가 가능한 1954년 초에 일찍 상경하여, 그동안 비어있던 주택을 수리 ·손질하고 세 형님이 세운 공장(해방 후 설립)은 일부 도난 분실된 기계와 손실된 설비를 복구 ·정비하여 일부분이나마 가동을 하고 있었다. 1956년 1월에 제주에서 상경한 필자는 형님 집에 거주하면서 대학 입시 준비를 하였으며 한양공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1957년 3월, 대학교 2학년 초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1960년초 제대 후 바로 복학을 하려했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 낮에는 형님이 경영하던 충무로 3가 大元 호텔 근처 大同精工合名會社(1972. 1. 14 大同精工(株) 법인 전환)에서 근무하고, 학교는 한양공대 二部 기계과 2학년에 편입하여 夜間部工大를 다녔다.

세 번째 직장이 된 대동정공합명회사는 自作한 coil 권선기(捲線機)와 소형압연기, 수동형 프레스인 뽄쓰, 엑센기, 괴탄을 연료로 사용한 소형 열처리 炉 등 기계설비를 갖춘 40~50평쯤 되는 소규모 제조 공장으로, 냉간(소형) Coil 스프링, 스냅링, 기계요소 부품과 薄板스프링, 방직기 부품과 소형 프레스 제품 등의 생산과 금속 열처리 기술을 주요 업으로 하는 회사였다.

형님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필자의 전공도 무선, 전자, 전기에서 기계, 금속으로 바꾸게 되었다. 특히 금속재료와 특수강, 열처리 기술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필자가 대동정공합명회사에 근무하기 전에 이미 제주도에서 4~5년의 직장근무 경력이 있었으므로 현장 근무 및 관리를 하는데 별로 어려움 없이 잘할 수 있었으며, 근무한 지 1년쯤 되었을 때는 공장 작업관리는 물론 영업 및 경영 전반의 책임을 맡고 회사 경영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요람기(搖籃期)인 1960년대 중반에는 대동정공사도 자동차부품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다. 1963년에는 기아산업 2륜 오토바이의 쇽업소버 스프링과 T -1500 콘트롤 케이블 등을 수주하여 생산 납품하면서 기아산업과 거래를 하게 되었고, 66년에는 신진자동차(대우자동차, 한국지엠으로 改名)에 스프링, CLIP류, 콘트롤 케이블을 개발 납품하였다.

형님 사업체인 대동정공합명회사의 경영을 맡아서 근무한지 12년(1960년 ~1972년)이 되는 1972년 당시는 회사도 많이 성장하였고, 경영상황도 호전 ·안정되었으며, 충무로 3가에 있던 회사(소규모 공장)도 용산구 문배동 공장을 거쳐 독산동 공장과 성동구 성수동 제2 공장으로 신축 확장 이전했다.

회사 경영 체계도 1972년 1월 14일 합명회사에서 大同精工 株式會社 법인으로 전환하고 6년 전에 입사해서 경영연수 및 근무를 하던 長조카(李龍珩 1940년생. 연세대 상과 졸업)가 대표이사로 취임, 회사경영을 맡게 되어 필자는 사퇴를 하였다.

이후 강서구 등촌동에 ‘大同케이블産業社’라는 소규모 공장을 신축하고 케이블 전문생산 회사(個人企業)를 설립 ·경영하게 되었으며, 이 회사가 대동시스템의 모태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인해 필자와 가족들은 많은 어려움과 난관에 처하고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그 와중에도 저를 믿어주시고 아낌없이 후원해 주신 광문인쇄소와 고인선 무선 라디오전파사 사장님, 그리고 저에게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며, 앞으로 우리나라에 이렇게 잔혹한 동족상잔의 아픈 역사가 재발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